[박정림의 이 책] <이어령의 말>에서 발견한 사유의 좌표

당연한 것에 의문을 던지고, 익숙한 세계에 새 빛을 비추는 지성의 기록

책을 읽는다는 건 단순히 활자를 따라가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저자의 사유와 내 사유가 만나는 일이며, 나만의 감각으로 세계를 다시 읽어내는 일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종종 손끝으로 ‘밑줄’을 긋는다. 밑줄은 단순한 독서의 흔적이 아니다. 그건 어떤 문장이 나의 마음에 닿았다는 증거이며, 그 순간 나와 책이 깊은 호흡을 주고받았다는 징표다.

<이어령의 말>을 읽으며 나는 습관처럼 밑줄을 그었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이 밑줄은 나만의 밑줄일 수밖에 없다.” 같은 책을 읽고도 각자 멈추는 문장은 다르고, 고개를 끄덕이는 대목도 다르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하게 지나친 문장이, 나에게는 삶을 흔드는 문장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밑줄은 단지 텍스트 위에 그은 선이 아니라, 독자와 세계 사이에 놓인 고유한 감응의 결과다. 그것은 읽는 이의 경험과 고민, 정서와 질문이 투영된 선택이다.

<이어령의 말>은 돌아가신 이어령 선생이 생애 마지막까지 품었던 말들, 사유의 정수들을 모은 책이다. 그는 단순히 지식을 나열하는 지식인이 아니었다. 시대의 지성으로서 그는 언제나 질문했고, 낯익은 것을 낯설게 보며 새로운 의미를 발굴했다. 인간, 언어, 종교, 예술, 창조, 죽음—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여겼던 삶의 요소들 속에 숨어 있는 본질을 날카롭고도 따뜻한 언어로 끌어올렸다.

책을 읽는 동안 몇 번이고 감탄이 터졌다. “정말 이런 단어에까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싶은 순간들이 이어졌다. 그는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단어 하나에도 깊은 생의 철학을 실었다. 언어는 그에게 단지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었다. 언어는 세계를 인식하는 창이자, 세계를 다시 창조하는 도구였다.

책 속 한 문장에서 이어령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우리들 앞에 보여준다. (p.55)

이 문장은 이어령의 언어관을 가장 잘 드러낸다. 그의 언어는 단지 보이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만들었다. 우리가 놓치고 있던 진실,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아름다움, 당연하다고 여겼던 허상—그는 그것들을 언어로 새롭게 드러내 보여주었다.

그가 펼쳐 보인 세계는 한 번 눈을 뜨고 나면 결코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세계다. 그의 문장은 삶의 표면을 넘어 그 이면까지 들여다보게 만들었고, 우리가 몰랐던 내면의 질문들을 자극했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히 읽고 끝나는 책이 아니라, 오래 머물며 곱씹게 되는 책이다.

우리는 모두 살아가며 방향을 잃는다. 때로는 슬픔 속에서, 때로는 충만함 속에서조차 허전함을 느낀다. 누구나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고, 물음이 다르며, 필요로 하는 말이 다르다. 그런 점에서 <이어령의 말>은 독자 각자에게 다른 방식으로 말을 건다. 어떤 이에게는 위로가 되고, 어떤 이에게는 질문이 되며, 또 어떤 이에게는 길잡이가 된다.

책을 읽고 밑줄을 긋는다는 것은 단순한 독서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나만의 질문을 세우고, 나의 시간 속에서 사유를 축적해가는 과정이다. 밑줄을 긋는다는 건 나의 삶을 기록하는 일이며, 그 순간 나는 독자가 아니라 사유자이자 창조자가 된다.

이것은 책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두 같은 시대를 살아가지만, 각자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고 다른 길을 걷는다. 누구는 멈추고, 누구는 돌아가며, 또 누구는 새 길을 만들어 걷는다. 같은 순간을 마주해도 서로 다른 감정과 판단으로 살아가는 우리들. 결국 우리는 모두 자기 삶 위에 ‘자기만의 밑줄’을 긋고 있는 셈이다.

<이어령의 말>을 덮으며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오늘 내가 그은 밑줄은 어떤 문장이었나. 그리고 그 밑줄은 앞으로의 내 삶을 어디로 이끌게 될까. 삶은 수많은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우리는 그 문장들 속에서 끊임없이 나만의 밑줄을 그으며 살아간다. 이어령의 말처럼, 우리가 밑줄 그은 그 순간이 언젠가 또 다른 이의 길을 밝히는 말이 되기를 바라며.

독서뉴스 박정림 칼럼리스트 redd22@naver.com

“나는 똑똑한 것이 아니라 단지 문제와 씨름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질 뿐이다. 독서는 그 시작이다.” – Albert Einste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