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보 과잉 시대, 인간의 본질적 사고력을 키우는 독서법으로서의 ‘심독(深讀)’

오늘날 우리는 방대한 정보의 홍수 속에 살아가고 있다. 클릭 한 번이면 알고 싶은 거의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최근 급속도로 발전한 생성형 인공지능(Generative AI)은 단순한 정보 검색을 넘어 문장을 작성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학습까지 대행하고 있다.
하지만 정보가 풍요로워진 만큼, 사람들의 이해력, 사고력, 질문력, 통찰력은 과연 더 깊어졌는가라는 질문에는 쉽게 답하기 어렵다. 오히려 ‘빨리 읽고, 많이 알고, 빠르게 판단하는’ 디지털 문화 속에서 깊이 읽고, 곱씹으며, 스스로 사유하는 능력은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서, 조선의 성군 세종대왕의 ‘반복 독서법’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디지털의 속도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아날로그적인 느림의 독서법이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조선 제4대 왕인 세종(1397~1450)은 한글 창제를 비롯해 과학, 음악, 천문, 농업, 의학, 법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국가 체계를 혁신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탁월한 통치력은 단지 뛰어난 학자나 신하들의 도움에만 의존한 것이 아니다. 그 근저에는 스스로 끊임없이 학습하고, 깊이 사유하며, 실천으로 연결한 독서의 힘이 있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그는 책 읽기를 단 하루도 거르지 않았으며, 식사 중에도 책을 펼쳐 옆에 두고 보았고, 밤늦도록 책을 읽느라 잠자리를 미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실록 세종 5년(1423년) 12월 23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실려 있다.
“즉위하심에 이르러서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아, 비록 수라를 들 때에도 반드시 책을 펴서 좌우에 놓으셨으며, 밤중이 되도록 읽기를 힘쓰셨다.”
그의 독서는 단순한 열정이 아닌 철학이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세종이 ‘많이 읽는 것’보다 ‘한 권을 깊이 읽는 것’을 더욱 중시했다는 사실이다.
세종 32년(1450년) 2월 22일자 실록에는 그가 경서를 읽을 때는 100번 이상, 역사서나 실용서는 30번 이상 반복해 읽었다는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다. 이는 단순한 학습을 넘어, ‘문제 해결을 위한 깊이 있는 이해’를 추구한 실천이었다.
세종대왕이 실천한 반복 독서, 즉 심독(深讀)은 단순한 암기나 기계적인 반복이 아니었다. 그는 매번 책을 읽을 때마다 새로운 시각에서 내용을 이해하고, 실제 사회 문제에 적용할 수 있는 통찰을 얻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으면,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문장의 의미나 구성의 논리, 저자의 의도와 관점을 새롭게 이해하게 된다. 반복 독서는 기억의 강화는 물론, 비판적 사고력, 추론력, 문제 해결 능력, 창의력을 종합적으로 키울 수 있는 과정이다.
이는 단기간에 많은 정보를 소비하는 오늘날의 디지털 독서 방식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오늘날 교육 현장에서도 문해력 저하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아이들이 글을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거나, 글의 내용을 자기 언어로 설명하지 못하는 일이 빈번하다.
이 역시 깊이 있는 독서 훈련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은 어린 시절부터 <구소수간(口授手簡)>과 같은 책을 수없이 반복하여 읽었고, 스스로 지식을 체화한 후 신하들과의 논의와 현실 정치에 적용해 나갔다.
그에게 독서는 현실의 문제를 푸는 열쇠였고, 백성을 위한 도구였다. 이는 ‘책 속에 길이 있다’는 격언을 그대로 실천한 삶이었다.

요즘 세대는 유튜브, SNS, 검색 포털, 챗GPT 등 정보 소비가 너무나 쉽고 빠르다. 그러나 빠른 정보는 빠르게 잊힌다. 반면 반복 독서는 한 권의 책을 천천히 오래 읽으며 스스로 질문을 만들고, 이해하고, 자기화하는 과정을 통해 깊이 있는 지식과 사고를 축적하게 한다.
생성형 AI는 정보를 가공해주는 도구일 뿐, 그것이 인간의 삶에 어떤 의미인지 판단하거나 본질을 파악하지는 못한다. 결국 사유의 깊이와 방향은 인간의 몫이다. 따라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사유의 반복’, ‘문장의 해석’, ‘의미의 재발견’을 통해 우리는 AI 시대에도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인간형으로 살아갈 수 있다.
세종대왕의 반복 독서법은 그 자체로 시간을 투자한 자기 수련이며, 깊이와 넓이의 균형을 갖춘 지성의 습관이다. 이러한 독서법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특히 생각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어린 세대에게 꼭 필요한 길잡이가 되어줄 수 있다.
정보의 양보다 중요한 것은 정보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능력이다. 반복 독서는 그 능력을 키워주는 가장 본질적인 방법이다. 세종대왕이 책을 백 번 넘게 읽은 이유는 그 안에 담긴 문장 하나하나를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도구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단어를 넘고, 문장을 넘고, 의미의 벽을 넘은 끝에 그는 백성의 고통을 해결하는 법을 찾았다.
AI가 정보를 요약해줄 수는 있지만, 책에서 의미를 찾고, 그것을 자신의 세계관으로 바꾸는 일은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인공지능 시대에도 우리는 책을 반복해서 읽고, 깊이 있게 사유하고, 삶 속에서 실천하는 ‘세종대왕식 독서법’을 되새겨야 한다. 그가 남긴 독서의 유산은 단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가 배워야 할 미래의 방식이기도 하다.
정성현 세종국어문화원 인문학연구소장 italk@naver.com